단기선교 팀의 일원으로 멕시코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Ensenada에서 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에 ‘꼬치미’라는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엔 두 개의 교회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언덕 위에 백인들이 세운 교회였고 또 하나는 로스앤젤레스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백인들이 세운 교회는 크고 화려했으나 교인들은 거의 없었고 로스앤젤레스 교회에서 세운 교회는 블록으로 벽을 쌓고 지붕만 덮은 건물인데도 교인들이 꽉 찰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꼬치미는 멕시칸 인디언들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역사는 백인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백인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리 '생명이 있는 복음'이라 할지라도 백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보니 백인들이 세운 교회가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사람들이 없었고 한인들이 세운 교회는 비록 초라한 건물이긴 하지만 그곳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것은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복음을 누가 전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나는 군에서 제대한 그다음 날부터 신학교 갈 때까지 옛 15 육군병원 자리에 세운 ‘국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두르는 띠를 짜는 회사였습니다. 그때 작업실에서 같이 작업하던 사람 중에 '박집사'가 있었는데 그는 그 회사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작업 중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물론,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내에 있는 교회에 가서 아주 격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이 구경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작업실에서 욕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박집사였습니다. 그는 12명이 한 조가 되어 일하는 작업실에서 ‘Trouble maker’ 였습니다. 그의 언행심사는 민망할 정도였고 모든 동료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집사가 틈틈이 전도를 합니다. 그러나 전도 받는 직장동료들은 “박형! 제발 나한테 만은 전도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박집사가 전하는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람의 ‘삶’이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하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는 물론,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해가 심했으나 그들은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사랑과 축복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복음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쓴(圖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진노하심에 맡겼고, 그 대신 원수가 주리면 먹을 것을, 목말라 할 땐 마실 물을 주었습니다.(롬12:14-21)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삶이었다면, 아무리 생명력 있는 복음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승리는 ‘도덕적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다윈이 주장한 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뒷받침 한 사람이 토마스 헉슬리였는데, 다윈의 진화론이 지지받은 결과는 그 이론 자체보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명망가들보다 도덕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높은 도덕성이 진화론의 이론을 뒷받침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덕성이 결여되었다면 그들의 이론도 사멸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성이 없는 기독교, 도덕성이 결여된 그리스도인의 삶, 도덕성이 없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도덕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리고 도덕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척도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삶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삶을 통해 그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이들의 진정성 있는 삶은 많은 영혼들을 주 앞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롯은 사위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위들은 장인어른(롯)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 장인어른의 세속적인 삶(창13:8-13, 19:26)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장인어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자체가 농담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농담이 되게 했던 것은 롯의 '삶'이었습니다.((창19:12-14) 이 사실을 두고 본다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저 사람의 구원'이 결정될 것이고, 저 사람에게 있어서 천국과 지옥은 내가 결정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마23:13) 미우라 아야꼬(삼포능자)가 쓴 책에 '소시지는 소시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시지를 24토막 내어 어느 부분을 들어내어도 소시지는 소시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루 24시간 중 어느 시간을 드러내어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볼 때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불신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도, 직장에 있을 때에도, 학교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2:23-24)라고 했는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것이 옳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삶(言行心事)을 통해 저들을 감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될 것입니다.
아롱마당 이야기
소시지는 소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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