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나의 큰아들 조셉이(웅이) 어렸을 때 이 아빠를 놀라게 한 말이었습니다. 웅이의 이 표현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웅이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데 그것을 말하려면 아들의 나이가 서너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여섯 살 때 미국에 왔으니 웅이의 그때 나이는 분명할 것입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강으로 바다로 들로 산으로 많이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같이 성경도 읽고, 성경공부도 하고, 찬송가는 물론, 많은 부류의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들과 같이 불렀던 노래 중에 지금도 뚜렷이 기억되는 노래는 당연히 ‘동요’였습니다.
나의 처음 이민 목회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럼비아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콜럼비아 한인 연합감리교회가 처음 개척될 당시 우리에게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를 열어주신 목사님은 Joe Tysinger 목사님이셨는데 나는 그를 만나 뵌 적은 없으나 내가 콜럼비아에 오기 얼마 전에 콜럼비아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교회로 파송되었기 때문에 거의 만날 수가 없었는데, 한 번은 목사님이 우리 교회 성가대를 초청해 주셔서 20명 정도의 성가대원들과 함께 왕복 6시간을 오가며 차 안에서 동요와 찬송가, 그리고 우리의 가곡과 세계 민요 등을 불렀는데 막힘이 없었습니다. 한 곡이 끝나면 또 한 곡이 이어지고….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고 이민자의 외로움을 떨쳐 내기에 충분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나에 대해 놀라워했던 것은 동요 때문이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내 나이대 사람들 중에 동요를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라고 할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같이 자란 고아원 아이들과 매주 한 차례씩 아이들을 모아 놓고 동요, 가곡, 찬송가, 세계 민요 등등. 많은 노래를 가르쳤고 함께 불렀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큰아들 웅이가 태어났습니다. 물론 매일은 아니었지만, 아들과 함께 제법 자주, 그리고 종종 웅이가 잠들기 전에 성경을 읽고, 읽은 성경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찬송가를 같이 부르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기도하고 난 다음 같이 누워 나의 팔을 베고 잠들기 전 동요 한 두어 곡을 부르며 잠이 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 웅이가 이 아빠를 천재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요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웅이야, 너 아빠랑 종이배 만든 거 기억나지. 만들 수 있어?” “응, 만들 수 있을 것 같애.” “좋아. 내일 일어나서 배를 만들어 냇가로 나가보자. 그런데 종이뿐만 아니라 나뭇잎으로도 배를 만들 수 있어”
“웅이야, 돌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우리 옆집에 사는 아이였어. 그런데 돌이는 자주 연못에 혹은 냇가에 가서 나뭇잎으로 만든 배를 연못이나 흐르는 물에 띄우고 그 배가 가는 데로 같이 달려가곤 했었어. 돌이에겐 이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너무 좋았던 거야. 오늘도 돌이는 연못가에 가서 주변에 흩어진 나뭇잎을 주워 배를 만들어 연못에 살짝 띄워 놓았더니 나뭇잎 배는 물에 빠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주니까 물 위로 이리저리 잘 떠다니는 거야. 그런데 이 배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건져내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왔어. 지금은 엄마 곁에 눕긴 했지만, 낮에 나뭇잎으로 만든 그 배가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거야. 내일 돌이가 갈 때까지 물에 가라앉지 말고 연못 위에 떠다녔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잠이 든 거야.” “웅이야, 아빠가 이 이야기를 노래로 불러볼까?” “응, 불러줘!”
나뭇잎 배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거리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곤거리는 갈잎 새를 혼자서 떠다니겠지.
웅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신비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을 때 “웅이야, 아빠랑 같이 불러볼까?” 그리고 이 노래를 천천히 같이 부르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곤 했습니다. 웅이도 꿈속에서 나뭇잎 배 혹은 종이배가 떠다니는 꿈을 꾸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 “웅이야, 전에 아빠랑 같이 보았던 과꽃을 기억하고 있어?” “응, 기억이 나.” “다음에 또 보러 갈까?” “그래, 같이 가. 아빠랑 같이 또 보고 싶어.”
“돌이란 아이에게 누나가 있었는데 이 누나가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늘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누나가 그만 시집을 가버렸어. 그런데 누나는 시집가고 없지만 올해도 과꽃이 마당 가득 피어난 거야. 누나는 이 꽃을 참 좋아했는데…. 돌이는 과꽃이 필 때마다 누나가 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과꽃이 피면 돌이는 다른 데 가지 않고 그 꽃밭에서 살다시피 했던 거야. 그런데 하루는 과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갑자기 누나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마음 한편으로는 화가 났어. 왜냐하면, 누나가 시집간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화가 났던 거야. 돌이는 누나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왔어. 시집간 누나가 늘 보고 싶었지만, 특별히 과꽃이 피는 가을이 되면 누나가 더 보고 싶었던 거야.” “웅이야, 아빠가 이 노래 불러볼 게 잘 들어봐. 같이 부를래?”
과꽃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어린 웅이는 가사에 감동이 되었는지 눈엔 눈물이 고였고 숨소리는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편 그의 표정은 와, 우리 아빠 천재인가 봐! 그 즉석에서 방금 했던 이야기가 노래로 불렸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3. 하루는 웅이가 내 팔을 베고 잠들기 전에 또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귀를 쫑긋이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숨을 죽이고 아빠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나 궁금한가 봅니다. “웅이야, 전에 목사님들과 같이 숲이 우거진 산에 갔던 거 기억나?” “응, 아주 재미있었어.” “그때 그 숲에서 뭘 봤지?” “다람쥐, 토끼, 개구리 등등”
그런데 우리가 산에 갔을 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지. 왜냐하면, 위험하니까. 그런데 밤이 되면 그 숲속엔 누가 있을까? 사람들은 밤이니까 그 숲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 안개가 자욱한 그 깊은 산속엔 작고 둥근 모양의 샘이 있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옹달샘이라 불렀어. 그 옹달샘엔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고여 있었는데 옹달샘에 고여 있는 그 물은 누가 마실까? 그런데 새벽에 토끼가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면서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얼른 먹고 친구들이 있는 안개가 자욱한 숲으로 뛰어간 거야. 이번에는 달이 떠 있는 밤에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던 노루가 목이 마르니까 옹달샘이 있는 이곳까지 달려와서 물만 얼른 먹고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간 거야.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
4. 어린 아들 웅이가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아빠의 팔을 베고 노래의 가사를 들려주고 노래를 불러 주었던 동요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노래는 방정환 선생의 ‘형제별’이었습니다.
형제별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추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이 형제별의 동요는 1920년대,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동요였으나 일제치하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였다기보다 오히려 나라를 잃은 어른들의 마음을 달래는 노래로 많이 불린 동요였다고 했습니다. 서너 살짜리 아들에게 나라 잃은 의미를 알려 줄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내가 무슨 애국자도 아니고, 나라 잃음에 대한 한이 맺힌 서러움은 거리가 먼 듯했으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나의 팔을 베고 아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들에게 이 동요 역시 가사 내용을 ‘그대로 풀어 설명한 뒤’ 조용히 노래를 부르며 따라 하도록 했습니다. 이땐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캄캄하게 해 놓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추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그 순간 감정이 북받쳐 숨이 막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헉헉거리며 울먹이고 있을 때 웅이가 아빠의 흐느낌에 멋모르고 따라 우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마치 민족의 한을 풀어내듯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지자 아들 역시 소리 높여 대성통곡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얼마를 울었는지 이제 진정이 되는가 싶었는데 아들이 또 훌쩍거리자 이번엔 내가 덩달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불 속에서 민족의 한을 달래는 순간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동요의 가사 내용을 이렇게 살짝 각색(脚色)해서 풀어 설명한 후, 그 즉석에서 원래의 동요를 부르다 보니 아들의 눈엔 이 아빠가 천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 아들을 속였다기보다는 그 나이에 맞는 ‘동심의 세계’를 선생님들이 만드신 동요를 들려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아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는 이 발상 자체가 아들 눈에는 이런 아빠의 모습이 천재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로는 콜럼비아교회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Sumter라는 곳에 한인연합감리교가 있었는데 그리 많지 않은 섬터 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목사를 기다리고 있어서 한동안 매 주일 오후에 Sumter를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오가며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렀는지 모릅니다. ‘머나먼 저곳 스와니강물 그리워라’, ‘들소들이 뛰고 노루 사슴 노는 그곳에 나의 집 지어 주’, ‘아늑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그리운 내 아들 돌아올 날 늙으신 어머님 기도해’,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깊어 가는 가을밤에 낯설은 타향에’, 독일 민요, ‘뒷동산 위에 핀 백합화야 너 아름다워라 너를 떠나서 멀리 가는 마음 구슬프도다 생각하면 눈물이 어리도다 잘 있거라 내 고향 잘 있거라 내 고향 잘 있거라 내 고향 잘 있거라 내 고향’ 등등등.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우리 부자(父子)간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이대로가 좋은데 시간은 우리를 그냥 붙들어 두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눈 깜짝할 사이 벌써 어른이 되어 목사가 되었고,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지금은 아들과 함께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어렸을 때 이 아빠와 함께했던 그 동심의 세계는 그의 생애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시간이었고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베푸신 특별한 은혜였음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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