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는 해마다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가 있었습니다.(요즈음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느 한 해는 정신과 의사 한 분이 강사로 초청되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등단해서 한 첫 마디였습니다. 말투 자체가 신경이 좀 쓰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내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은 모두 정신병자로 보이고, 교회는 그들을 수용한 집단수용소로 보입니다.” 비(非)그리스도인이 강사로 초청된 것도 못마땅했는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다음, ‘기독교인들은 모두 정신병자들과 같고 교회는 그들을 수용한 정신병자들의 집단수용소’라는 그의 주장에 대해 한 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에 의하면 ‘생각(알고 있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상태를 일반적으로 정신병 증세(症勢)’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가 정신병의 증세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 정신병자들이요 교회는 그들을 수용한 집단수용소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서로를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불신자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規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최소한의 상식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저들과는 가치관이 달라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확연하게 다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저들과 구분되지 않고, 오히려 저들보다 더 상식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관념(觀念)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믿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이 내면(內面)이라면 믿는다는 것은 외형(外形)입니다. 믿음이 실체(實體)라면 믿는다는 것은 그 실체의 나타남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속과 상관없이 겉을 꾸밀 수 있으므로, 믿음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비극일 것입니다. 내가 총각 때, 교육전도사로서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그때 30대 후반의 여자 한 분이 등록했습니다. 물론 결혼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교회에 등록함으로써 나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저렇게 청순하고, 품위 있고, 세련되고, 우아한 여인을 만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단 꽃꽂이를 담당했는데, 매주 토요일마다(중고등부 예배가 있는 날) 한 아름의 꽃을 안고 들어와서 꽃꽂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교회 전체가 밝아졌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들도 모든 교인이 그분으로 인해 행복해 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이번 주 토요일엔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교회 안이 어쩌면 그렇게도 칙칙하고 썰렁했는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주일 예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화하고 싶었으나 나의 이 같은 마음이 드러날까 봐 전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토요일과 주일에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분명히 무슨 문제가 생겼을 것 같아 심히 걱정되어 목사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그토록 설레게 했던 그 여자는, 지난 8개월 동안 교회 꽃꽂이를 하면서 부지런히 교인들의 돈을 챙겨 한밤중에 남의 눈을 피해 도망(夜半逃走)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매우 유능(명)한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8개월간 교회에 머물면서 교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던 것입니다. ‘사기꾼들의 가장 큰 자산(資産)은 신용(信用)’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우리를 속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씁쓸해집니다. 이런 일은 인간 세계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얼마든지 위장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과는 전혀 무관하면서도, 그리고 가장 사악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위장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 우리가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냄으로, 적어도 불신자들로부터 ‘정신병자들’이라는 말은 듣지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되려면 알고 있는 대로 살아야(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흑백논리(黑白論理)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兩者擇一)하며 살아야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마5:37) 가끔 세상을 모나게 살면 안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못 살아서 그렇지, 세상에서 모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따로 세움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고후6:14-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저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비교할 때, 달라도 확실히 달라야 하고 그 ‘다름’을 살아 내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입니다.
아롱마당 이야기
흑백논리(黑白論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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